[성우인터뷰] 20. 이승행 “그랑죠 키즈, 같은 세대의 지망생들에게 전한다”
“그랑죠 세대죠. 89년생이니까요. 세일러문, 영광의레이서(사이버포뮬러) 보며 자랐어요.”
스무번째 인터뷰는 오랜 기간 성우 준비를 해 왔고 다소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망생들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낙방에 분루를 삼키는 것은 익숙한데, 이제는 시간과 나이의 무게로 고심이 크지 않은가. ‘젊으니까 다음 기회가 있잖아’란 위로를 이제는 받지 못하는 사람들. 어느새 고민을 토로할 경험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
지금 이 분이라면 적격이지 않을까. 어느 때 이상으로 다른 사명감으로 펜을 든 이유다. 필자도 공감하는 그 심정, 제대로 공감할 분께 길을 묻는다.
이승행
2017년 대원방송 8기 입사
특촬물
파워레인저 다이노소울 - 유노 소울그린
파워레인저 갤럭시포스 - 안톤박사 등
가면라이더 이그제이드 - 김우종 민태용 등
애니메이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 머스큘러, 엣지 쇼트 등
블랙클로버 - 브모다 등
라디앙 - 닥
원피스 - 마하바이스, 카와마츠 등
유희왕 VRAINS - 도건우
유희왕 SEVENS - 신세정
조이드 와일드 - 내레이션 등
마징가 제트
빨강머리 앤
소공녀 세라 - 뒤파르주 등
키다리 아저씨 - 아마사이
루팡3세 시리즈
블루록
GO! 프린세스 프리큐어 - 절망보그 남용민 등
호빵맨 (대원판) - 볶음국수빵맨, 기차맨, 주먹밥맨 등
SD건담 월드 히어로즈 - 감녕 크로스본 건담, 장각 샤이닝 건담
이상 대원방송
극장판 애니메이션
화장실콩쿨 - 상민 (언더그라운드 성우 시절,첫 주연작)
반도에 살어리랏다 - 오준구(언더그라운드 성우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이고 - 아가츠마
게임
마비노기 - 마우러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던전앤파이터 - 테이다 베오나르
일곱개의 대죄 그랜드 크로스 - 페텔기우스 로마네콩티
현재 보이스투보이스 출강
프롤로그 – 그냥 매 순간이 길고 쉽지 않던 성우
순탄치 않은 게 현대인의 운명이라지만 그래도 성우 이승행의 스토리는 급커브가 좀 많다. 듣다보니 삶의 변곡점마다 변주의 연속이다.
유년 시절 히어로 그랑죠는 소환 시간이 길어 위태했다. 육망성 그리는데 13초쯤 걸렸나? 그런데 그의 지망생 시절도 짧지 않아서 6년하고도 반년간 와신상담했다. 1차 문턱 넘는데도 5년, 십수 번 넘는 도전이었다. 꿈만 같은 합격 통지 후엔 태어나기도 전 작품들의 재해석 과제다. 어릴 적 추억을 돌아보는 낭만으로 풀어내고 프리랜서가 됐더니 웬걸, 이젠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 사태로 격동하는 성우계를 몸으로 체험한다. 인생 참, 계획대로 예상처럼 안된다. 서곡부터 심상찮지 않은가.
제 1악장 - 성우가 되자마자 어릴적 추억의 작품들 재더빙 러쉬, 쉽지 않아
성우분들을 스무 분이나 만나 뵈니 공통된 부분이 있다. 누구나 시작했을 때 첫 데뷔작, 전속 초반의 작품들과 환경을 선연히 기억한다는 점. 당사자에겐 개인적인 추억이고, 듣는 이에겐 당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라 재밌는 포인트다.
당연 그의 이야기도 기대된다. 2017년 입사, 오오! 마침 응칠, 응사, 응팔 3연타가 몰아치며 레트로 바람에 삼켜진 2010년대 기수다. 사실 아직도 과거형은 아닌게 여전히 90년대 명곡이 리메이크되고 펜티엄 셀러론은 레거시 브랜드로 전환되고 추억의 게임이 재탄생해 돌아오고 있으니 10년 족히 이어진 바람이다.
그런데 가만 듣고 있자니, 애니메이션 채널에도 같은 바람이 불었나? 자꾸 ‘복고’ ‘레거시’ ‘재해석’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데뷔하자마자 신작 아닌 신작들의 러시를 맞이한다.
“그냥 (할아버지 톤으로) ‘쇠돌아아아’하는 기억이에요.”
먼저 마징가 제트. 보자, 2018년 봄에 대원방송에서 재더빙 및 재방영했으니 대원방송 8기 성우들은 입사 2년차에 투입됐겠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작품을 굳이 연도별로 설명하자면 1972년 제작됐고 우리나라에서도 1975년에 흑백으로 첫 방영됐다. 아마 이걸 실시간으로 보았을 세대가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1990년대 비디오 시장을 통해 재더빙되어 나올 때 기억도 이젠 아득하다. 이때 쇠돌이, 철이를 맡은 분들이 고 백순철, 고 정경애로 이젠 전설이 된 분들이니. 당연히 현재 청소년들보다는 부모님, 아니 어쩜 조부모님 세대가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조부모님 세대 때 1차 활약, 비디오 꿈나무였던 부모님 세대에 2차 활약한 후 기약없이 격납고서 쿨쿨 자던 마징가는 MZ세대 앞에 다시 일어나 3차 활약을 한다. 다소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나히아에 열광하는 손주들까지 3대를 TV 앞에 모이게 해 준 뜻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한 건 작중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든 쇠돌이와 애리를 베테랑 김영선, 정미숙 성우가 맡고 이들의 든든한 서포터인 할아버지 박사님들은 걸음마를 막 뗀 전속들이 맡으니 연령을 초월하는 성우 세계의 묘미다.
그러나 첫 방영 땐 태어나지도 않았던 전속 성우들에겐 이를 새로운 숨결로 재해석한다는게 너무 어려웠을 거 같다. 당시 20대던 이승행 성우는 자신보다 40살은 더 먹었을 노박사님에 배정됐고 김진홍, 정의한 등 그의 동기들도 함께 고군분투했다. 감회가 어땠을까.
“재더빙으로 화질이 보정됐음에도 첫인상은 ‘이거 진짜 옛날 애니메이션이구나’ 였어요. 시즌제도 없던 시절인데 백 편이 넘는 작품을 그냥 휴식기 없이 쭉 다 녹음했어요. 그래도 정미숙, 김영선 선배님 등 베테랑들이 오셔서 같이 입을 맞춘 덕에 우리로선 그냥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기회죠.”
그런데, 마징가만이 아니었다. 역시나,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에서 방영됐던 고전 작품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오는게 아닌가. 몇 년 전부터 대원방송에서 새벽 시간대에 ‘NEW’자를 붙이고 방영되던 작품을 보면 이게 ‘神’작인지 ‘新’작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어디 기억나는대로 읊어보자. 먼저 더빙팬들에겐 아쉽겠지만 자막판으로 나온 작품으로는 2017년 북두의권 본편, 2021년 기동전사 Z건담이 드디어 한국에 정식 상륙했다.
수십년 전 더빙판을 있는 그대로 재방영한 작품도 있다. 1970년 제작, KBS에서의 방영조차(그것도 재더빙, 재방영이다) 무려 80년대 중반이었던 이상한 나라의 폴을 그때 목소리 그대로 방영했다.
그럼 마징가처럼 새로 더빙되어 그가 참여하게 된 작품은?
“빨강머리 앤, 소공녀 세라, 키다리 아저씨 같은 명작극장 시리즈요! 제가 어릴 적 보고 자라난 작품들이 찾아와서는 ‘우리같이 놀자’ 하듯 제게도 꽤 비중 있는 배역을 연거푸 주는 거예요.”
“감회가 남다르셨겠어요.”
“특히 앤은 제가 좋아하던 작품이라 뜻깊게 추억해요. 우정신 선배님(앤)이랑 최문자 선배님(마릴라)이 호흡하는 걸 옆에서보다 빠져들었던 순간은 첫손에 꼽는 인생의 추억이에요. 분명 저 역시 성우로서 찾은 일터인데, 그 사실을 잊고서 관객이 되어선 넋 놓고 감상하고 있었죠. 앤과 마릴라가 붙는 씬에선 ‘캐릭터의 생명력을 어쩜 저리 예쁘게도 불어넣는담, 그래! 이게 예술이고 카타르시스지’하며 감탄했어요.”
“아무래도 기존의 더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요, 그때 성우분 중엔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계시죠.”
“맞아요. 특히 저는 어릴 적 길버트를 맡은 오세홍 선생님의 팬이었어요. 어떤 목소리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요.”
분명 과거의 명작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부담이 있는 일이다. 그래도, 일터에서 환희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실력을 쌓아갈 수 있었던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제2악장 - 코로나 시국, 걸리면 개인 문제 아니고 ‘이러다 우리 다 죽어’였던 성우들 이야기
그동안 일을 돌이켜보면 한참 선배들에게 배워야 할 시기임에도 정작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선배들도 처음 겪는 일, 코로나 시국 말이다.
“전속이 풀리자마자 코로나가 터졌고, 언택트 생활이 시작됐죠. 지금도 그 영향은 여전히 남았어요.”
“그 땐 성우들의 활동도 많이 달랐을거 같은데, 어땠었나요?”
“우선 따로따로 녹음이 많았죠. 기존과 비교하면 일장일단이 있는데,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공동작업 할 때가 좋았어요.
건강과 목소리 관리에도 더욱 신경의 날을 세워야 했다고 한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큰 여파를 몰고 오는 게 역병이란 말에 걸맞게 녹음 환경에도 무시무시한 역풍을 불러왔다.
“젤 신경쓰이는 문제가 다름 아닌 목소리 관리에요. 걸리면 후유증이 생긴다잖아요. 우리에겐 목소리가 자신감인데, 폐나 기관지에 어떤 후유증이 남을지 걱정이죠. 다행히 전 한 번도 안 걸렸는데, 주위 동료들이 잘 걸리네요. 녹음은 밀리죠, 그러다 선배님 중 건강 문제로 배역이 교체된 분도 나오죠, 그러다 심할 경우 녹음 자체가 경제적 사정으로 취소되기도 했어요.”
“무시무시하네요.”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많이 안정되고 있어요. 아직 여파가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제3악장 – 코로나 터널 탈출, 어느덧 7년 아니 8년 차인데 변주는 계속된다
그래도, 코로나 시국 와중에 급변한 환경 속에서 더욱 공들였던 덕에 시간이 흘러도 각별히 애정 가는 작품들이 생겼다. 지금도 찾아보는 작품들이다.
“요새도 가끔 그때 것을 모니터링해요. ‘이게 벌써 이리됐나? 세월 빠르다’ 싶기도 하고 ‘좀 더 잘할 걸’ 후회도 많이 남네요. 특히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지금도 자주 돌아보고 있죠.”
“TV에서 나오는 본인 목소리를 자주 찾아보신다는 거죠?”
“사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찾아보지 않는 편이에요. 오늘, 내일 할 새 작품에 바빠서. 처음 제 목소릴 TV에서 들으면 신기했는데, 요새는 시사하면서 또 연습하면서 제 목소리를 너무 자주 들었다 보니 그걸 다시 찾아보고 듣고 신기해하고 할 시긴 지난 거 같아요.”
어느덧 잔뼈가 굵어 후배들도 많이 늘었다. 그럼 이제는 좀 편안해졌을까. 그러나 그의 곡은 여전히 변주가 많은 모양이다.
“벌써 2, 3년 후면 10년 차인데 걱정이죠. 돌이켜보면 그간 생각하는대로 되는 일이 드물었거든요. 전 지금도 나 자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상황이란건 늘 달라져요. 과거와 현재가 다르듯 미래도 달라지고 있어요. 특히 요즘은 대원만이 아니라 대교, MBN 등 다른 방송국 활동도 늘어가요. 근래 TV 건강정보 프로그램 ‘명사수’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던 결과물은 ‘이거 의도한 대로 결과물이 잘 나왔으려나’ 하며 자주 복습했어요.”
“TV 내레이션은 애니메이션과 어떤 부분이 다를까요.”
“우선 담당 PD마다 요하는 바가 다르고 ‘장르가 이건 더빙, 이거는 해설’ 이런 구별 없이 필요하면 이것저것 적절히 섞어 만들어요. 어떤 땐 ‘성우답게 해주세요’ 하다가 다시 ‘자연스레 해주세요’ 새 주문이 들어오기도 하고 저 역시 때마다 이런저런 안 해본 시도를 해요. 뭐랄까, 이제는 성우, 일반인의 기준이 없는 거 같아요.”
“기준점이 사라진 걸까요.”
“이제는 그 둘의 ‘사이’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그 둘의 사이를 1에서 10까지로 구간을 나눈다면, 그동안은 1 아니면 10으로 정확히 구분 지었죠. 전 이제 필요에 따라 2에서 9 사이의 어딘가를 생각해내 꺼낼 수 있는 그런 성우가 되고 싶어요. 연구하고 있는 부분이죠.”
제4악장 – 6년하고 반년간 성우고시 터널을 지난 그가 지망생들에게 조언하는 변주 포인트
서두에 밝힌, 드디어 오랜 기간 성우를 꿈꿔온 이들이 귀를 기울일 시간이 왔다.
그는 중학생부터 성우를 꿈꾸었다. 어릴 적 ‘내 목소리는 특이하다’고 의식했다. 누나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다 보니 자신도 덩달아 따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전공은 이공계를 선택했다. 공과대생이었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잘 안 맞았단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방송 성우를 목표로 하고 모든 삶을 거기에 집중시켜 새 판을 짰다.
“성우가 되겠다고 하니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던가요.”
“전혀요. 부모님이 한번 제게 진심이냐며 물었던 게 다예요. 당시 서울과학기술대 학생이었는데 휴학계 내고 성우학원을 다녔어요. 그런데 지망생 시간이 기약 없이 4, 5년 흐르니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는 권유는 받았죠. 휴학 기간도 더는 연장할 수 없는지라 일단 대학 졸업은 하자며 복학했어요. 천만다행히도 졸업 직전, 마침내 합격했어요.”
6년하고 반년, 길다면 정말 긴 세월이다. 그만큼, 혹은 그 이상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지망생들에겐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먼저, 어떻게 그동안 조바심 내지 않고 때를 기다릴 수 있었을까.
혹 그간 낙방할 때도 최종 합격 직전까지는 여러 번 갔다 왔기에 자신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반전이다. 놀랍게도 5년간은 1차 합격 문턱조차 넘어가지 못했단다.
“1차 시험에서 다 떨어졌어요. 그러다 5년째 되던 해 처음으로 대원방송 2차 시험을 보게 된 거예요. 끝까진 못 갔는데, 그리고 바로 다음 해 시험에 합격했죠”
“만일 그 때 안되었다면?”
“만일 그 때 안되었으면? 그럼 아마 지금까지도 성우 공부를 하고 있었겠죠?”
그랬다면 그는 10년을 훌쩍 넘긴 장수 지망생이었을 터, 어찌 그렇게도 놓지 못할 꿈이었을까.
“성우는 왜 그리도 매력적인 꿈이었을까요.”
“우선 공부가 재밌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며 살고 싶다 느낄 만큼 매력적이에요. 그동안 공들인 게 있어서 포기 못하는 점도 있었지만요.”
요즘 지망생들은 처음부터 목표할 방송사를 정하고 전략적으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도 처음부터 애니메이션 방송사를 타겟으로 정하고 한 우물만 판 것일까. 대답은 ‘노’였다.
“전혀요. 그땐 어느 방송사에 갈지 알 수 없었죠. 오히려 주변에서는 제가 KBS에 잘 어울릴 목소리라고 했어요. 나도 ‘어 그런가? 나는 오디오 드라마 쪽인가?’했었죠.”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망생들에게도 한 우물 전략은 추천하지 않는단다.
“요즘 지망생들 애니메이션, 혹은 라디오 드라마, 내레이션 이렇게 한쪽만 정해서 공부하는데 한길만 파는 건 경험자로서 추천하지 않아요. 사실 저도 4년간 연극 스타일을 주로 공부했는데 원장님(19회 인터뷰 주자 김지혜 성우)을 만나면서 비로소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장르 가리지 않고 공부하기 시작해 합격한 사례에요. 그때에서야 부족하고 모난 부분이 보완된 거 같아요. 실제로 그러고 나서 한번도 안되던 2차에 처음 붙어보니 그 사실을 알 거 같았죠. 이제는 장르를 구분하기 이전에 그 작품 자체를 들여다봐야 해요. 드라마도 애니도 작품마다 내용은 다 다르잖아요. 애니메이션도 유아물이 있는가 하면 제가 선호하는 성인들 타켓 작품도 있고 실로 다양하죠. 다시 생각해보는게 좋아요.”
제5악장 – 성우 양성 지도자로서도 5년째, 장기전에 돌입한 분들에게 ‘흔들리지 마’
“어느덧 학원에서 강의를 하신지도 5년째가 되셨어요.”
“지망생분들을 보면 역시나 생업과 공부를 병행하는 실정이 가장 큰 어려움 같아요. 특히 오랜 기간 성우 공부하다가 나도 모르게 점차 마음이 닫히는걸 많이 봐왔어요. 자존감이 떨어지고 마음이 다쳐나가는 모습들, 그런 분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잘 헤쳐 나가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인생 자체가 흔들리지 않게 돕고 싶어요.”
그는 ‘연기가 기술은 아니지만, 공학도 출신이라서인지 그런 측면에서의 접근법 또한 고민한다’고 한다. 수업이 추상적이지 않게, 디테일하게 가르쳐 주고자 강의법을 업데이트하고 있다고. 그리고, 멘탈케어를 위한 효과적 방법 또한 연구 중이다.
“전 멘탈이 좋은 편인데, 저와 반대로 자기 파괴적인 학생들을 자주 봐요.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무엇보다 시험 탈락에 크게 요동치죠. ‘별로인데?’란 말에 ‘난 구제불능’이라고 좌절하는 그런 분들이요. 그럼 저는 ‘오늘은 별로였다’라고 정정해서 다시 말해줍니다. 그리고 지금 그 기분을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도록 코치해줘요.”
장수 지망생들에게선 자신 또한 배우는게 많다고 한다.
“제가 보낸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을 버티는 분들도 만나봤어요. 10년, 20년 넘게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은 주변에선 안쓰럽게 볼지언정 본인은 그에 휘둘리지 않고 인생이 휘청이지도 않으시죠.”
“사실 가장 큰 두려움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문이 닫힌다’는 조바심이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곧 ‘안 뽑는다’는 건 아니거든요. 시대는 바뀌고 있어요. 내가 계속 포기하지 않고 그 문을 두드려보고 그러다보면 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상황이 뒤집힐 수도 있어요. 그런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는다면, 포기하지 않다 보면, 이를 자기 매력을 키우는 마인드로 무장하는데까지 도전한다면 어떨까요. 그게 맞다고 봅니다. 그것이 합격에 필요한 실력과 더불어 하나 더 추가할 요인이에요.”
실제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 중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제 동기 중에서 진홍(김진홍, 대원방송 7기)형도 34살에 합격하면서 당시 우리 방송국 기록을 깼어요. 중요한 건 함께 하고 싶게 만드는 기분 좋은 에너지에요. 이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 그런 힘을 갖춘 분들이 주변에 계세요. 대화가 기분 좋은 사람들이에요. 실력도 합격하기 충분한데 그런 기분까지 선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럼 심사위원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굳이 그간의 관습 같은 것에 사로잡혀 안 뽑을 이유가 있나요.”
제6악장 – 최종장, 성우 이승행의 ING는 ‘공부하는 성우’
최종장은 다시 성우 이승행의 이야기로 돌아와 마무리한다. 지망생으로, 교육자로, 언택트와 복고풍 바람이 불던 시대의 좌충우돌 신인으로서 많은 변주를 감내해 온 그가 이제는 평온한 성우의 장으로 돌아와 그간 어떤 작품을 만들어왔는지, 앞으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청해 듣는다.
“사실 저는 정식 성우가 되기 전 독립 애니메이션 주연을 맡은 적이 있었어요.”
우연찮게 전속 성우가 되기 전 독립애니메이션 ‘화장실 콩쿨’(감독 이용선)의 주연을 꿰찼다. 제11회 인디애니페스트 3개 부문 수상작으로 독립애니메이션 계에선 주목받았던 작품이다. 이때 인연으로 이용선 감독의 2018년작 ‘반도에 살어리랏다’에도 함께 했다.
“이때 활동이 미리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준 건지도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그 감독님 작품이 제 취향이었어요.”
지망생 시절 활약은 이게 끝이 아닌데, 예능 프로 출연도 했었다. MBC 블라인드 테스트 180에서 가짜 아프리카인(그림자와 목소리로만 출연해 엉터리 아프리카말을 구사했다) 방청객들을 속이는 역할을 했다. 처음엔 현장의 진짜 가나 사람에게는 티가 날 수 밖에 없어 방송작가가 우려했다는데 다행히 속이기 미션에 성공했다. 역시나 성우 준비를 하며 밑거름이 되었던 활동 일화다.
입사 2년차 때 파워레인저 다이노소울의 소울 그린 유노를 맡은 건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파워레인저 시리즈의 주역을 신입 때 맡았으니 기대 반 부담 반이 아니었겠는가. 특히 그는 “후뢰시맨의 팬이었고 특히 김환진 선배님 활약을 좋아했었다”고 밝힌다.
“솔직히 부담이 기대보다 더 컸어요. 내가 다섯 레인저 중 하나라니 고통스럽기까지 했죠. 소리 지르고, 대사도 분량도 많고, 게다가 엄상현 선배님 등 함께 하는 베테랑 선배들이 많았어요. 근데 막상 돌입해보면 재미있게 했어요.”
반면 파워레인저 갤럭시포스에서는 괴인 등 단역을 많이 했다고. 돌이켜보면 주역만 12명인 작품이라 마이크 1개당 4명이 붙어야 해서 힘들었단다. 또 맡은 역할이 역할인지라 괴인이 내는 (고함지르고 죽고 할 때 내는) 소리하다 고생했다는데 재미는 있었지만 그래도 괴인보단 그린이 좋단다.
원피스에서는 와노쿠니편 때 한창 활약했다. 무사 카와마츠로 맹활약했는데 루피가 각성하는 시점에서부터 줄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비중이 컸다고. 투니버스에도 데뷔 7년만에 드디어 최초 출연했다. 무려 명탐정 코난에서 범인을 맡았다. 코난은 타 방송사의 성우가 출연하면 높은 확률로 범인에 캐스팅되는 역사가 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마도 캐스팅 때 나의히어로아카데미아에서 맡은 머스큘러 같은 느낌을 원했던게 아닐까하고 추측했단다.
“그러고보면 노역, 열혈 할거 없이 다방면에서 활약하시네요.”
“맞아요. 그리고 노역이 제 취향이기도 해요. 마비노기 게임에서도 마우러스라는 노역을 맡았어요. 맞다 조이드! 거기서도 노역이었죠.”
“노역, 어렵진 않나요?”
“물론 베테랑 선배님들처럼은 힘들죠. 그런데 다른 캐릭터 연기보다는 노인 캐릭터 연기가 제겐 무난해요.”
성우 인생, 이제는 10년 차 ‘A급’의 시간으로 달려가고 있다. 여러 곡절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해 온 그의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딱히 어떤 걸 더 하고 싶다는 것 보다는, 공부에 욕심이 생겼어요. 이전 어느 인터뷰에서는 멜로에 욕심이 난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폭넓은 연기 공부에 욕심이 나요. 그야말로 ‘성우는 공부하는 직업’이라고 느끼는 중이에요. 하여 무대를 가리지 않고서 이제는 드라마, 연극을 통해서도 내공을 쌓아보고 싶어요. 요즘 들어 연기 내공을 더 쌓아야겠다는 체감을 많이 해요. 8년 차가 되니까 그 생각이 더욱 강해져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데뷔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성우 이승행이란 사람은?”
“여유라던가, 연기의 깊이감은 생긴 거 같은데... 그래도 더, 좀 더 해 나가야죠?”
공부하는 성우 이승행과의 인터뷰였다.
글 권근택
사진 성우 이승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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