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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인터뷰> 18. 김은연 김해에서 온 방과후 성우 교사, 절대음감 성우가 되다

 

 

 

 

절대음감이시라면서요?”

 

잠깐잠깐 TV에서 듣던 그대로 노래를 들려주었다. 스피커로 듣던 그대로의 음색 한 줄을 잡고 이 글에 엮어 도레미파솔라시도까지 연주해 본다.

연재를 하다보면 한결같이 독특한 곡절이 있다. 열여덟번째만에 처음 만나는 20대 주자라 짧거나 적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언젠가부터 잊고 있던 어릴 적 꿈을 기억해내고 부모님 뜻을 어긴 효녀, 수능에서 본래 능력의 마이너스 100점 패널티를 받고도 손꼽히는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영재, 어린이들에게 성우의 세계를 가르쳐주며 어느덧 자신도 성우가 된 선생님, 성공한 덕후, 검소한 멋으로 무장한 센스쟁이 아가씨, 7080세대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흔드는 명작 만화 시리즈의 히로인,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통해 성녀의 길을 걷겠다는 절대음감의 연기자.

이렇게 이번 이야기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일곱가지 이야기로 에스컬레이트하며 진행한다. 당찬 스물아홉 아가씨 성우 김은연의 이야기다.

 

 

 

대원방송 성우극회 72016

출연작

애니메이션

김지나 - 100% 파스칼 선생님

스네이크 히어로 우와바미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빨간머리 앤 - 나레이션

원피스 - 코제트, 베이비5, 모차, 샬롯 스무디 등

이토준지 컬렉션 - 키타와키 나츠미 등

톰 소여의 모험 - 에이미, 리제트, 베니 등

플랜더스의 개 - 누레뜨

학원 베이비시터즈 - 마미즈카 타쿠마, 쿠마즈카 야요이

마징가Z - 아수라남작 (이상 대원방송)

특촬물

가면라이더 고스트 - 한지호

가면라이더 이그제이드 - 우승재 등

파워레인저 애니멀포스 - 조하늘 엄마 등

마징가Z 인피니티 - 아수라 남작 (극장판)

노래

엄마찾아 삼만리 - 오프닝

꼬마너구리 라스칼 - 오프닝, 엔딩

퍼즐앤드래곤 크로스 - 엔딩

샾킨즈 - 삽입곡

던전 앤 파이터 숙명의 문 오프닝

빨강머리앤 오프닝, 엔딩

 

#- 김해 출신 소녀, 나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일기를 꺼내어 꿈을 깨닫다

 

두 번째로 만난 대원극회 출신 성우다.

첫 인상을 서술해 보겠다. 우선, 미인이다. 도회지 멋쟁이보다는, 어딘가 서울에 갓 상경한 섬소녀나 섬마을에서 풍금을 켜던 선생님같이 낯선 매력이 있다.

사실 섬 출신은 아니고, 경상남도 김해에서 왔단다.

 

지난번 김성연 성우는 초인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이번엔 어떨까. 묘하게도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 한 부분이 비워져 있다. 어릴 적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어른이 되어서 역추적해 찾아냈다.

 

전 노래도 좋아하고 공연무대도 좋아하고 정말 많은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제 어릴 적 꿈이 뭐였냐면, 성우였더라고요.”

 

어릴 적 고향에서의 기억은 솔직히 TV보는거 말고 할 게 없을만큼 한미했다. 특히 그 시절, 밀레니엄 시절만 해도 PC나 인터넷은 아직 부유층의 전유물에서 대중적 산물로 한참 전환되던 시점이라 매스컴의 영향은 지금 이상으로 컸다.

가뜩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초등생 시절이다. TV를 친구이자 스승으로 두던 그 시절 인생을 좌우할 자문을 했다.

 

저기 들려오는 저 듣기 좋은 소리의 정체는 무얼까 궁금한거죠. 설마 기계로 쪄 낸 소린 아닐 터, 성우의 존재를 일찍부터 알게 됐어요. 하지만 워낙 꿈 많을 시절이라 바로 성우를 목표한건 아니고 폭넓게 성악가, 배우, 특히 정태우 안재모 조승우처럼 목소리가 좋거나 노래 잘하는 뮤지컬 배우를 막연하게 선망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죠. 아니더라고요. 얼마 전 초등학교 3학년 때 제가 쓴 일기장을 찾았어요. ‘내 꿈은 성우라고 적혀 있어요. 기억이 안 나는데 출발점이 거기 있더라고요. 다만 다음 글귀를 보면 막연하게 성우를 꿈꾸기에는 내 목소리가 성우들처럼 좋다는 생각도 못하기에 그저 팬으로만 만족하자라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한동안 잊었나 봅니다.”

 

그녀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본인은 겸손하게 말하지만 듣고 있으니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재능도 갖췄다. 아직 어떤 직함을 가진 어른이 될런지 속단 못할 중학생 시절에도 학예회가 되면 혼자서 뮤지컬 연극의 대본, 연출, 출연, 노래를 다 맡아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배우일지 연출가일지 가수일지 성우일지 프로듀서일지 알 수 없어도 대강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정할지 예감하게 만든 소녀였다.

공부도 잘했다. 고교 시절 전교 1등도 끊어본 그녀다. 때문에 그게 암초가 될 뻔 했다. 부모님은 수재인 딸을 변호사, 혹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키우길 바라셨다고. 실제로 수시전형을 통해 고려대 언어학과 입학을 예정에 두고 있었고, 그렇게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 수능 100점 까먹고 원하던 대학 들어가다

 

배탈이 났어요. 수능 때! 그래서 낙방한 거예요. 무려 예상한 것보다 100점이나 떨어졌어요. 그런데, 그래도 재수는 안했어요. 단국대 공연영화학부에 입학했거든요.”

 

수험생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함에도 대단한 일을 두 가지 해 낸 그녀다. 첫째는 100점 마이너스인 상황에서도 인서울에 입학했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니 몇 점 이었나 물어볼 걸 그랬다.

그리고 더 대단한 일은, 그동안 부모님 말에 거역하지 않던 착한 소녀가 처음으로 자기 뜻을 밀어붙였다는 것. 드디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하고 밀어붙였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인지, 하늘이 도운 것인지. 그녀는 재수를 권하던 부모님 뜻을 꺾고 원하던 대로 노래하고 연기하는 길을 택했다.

그건 최고의 효도를 위한 불효다. 자기 길을 스스로 찾아 개척하는 자녀야말로 최고의 효녀 아니면 무엇이겠나.

 

이제는 제 길을 응원해주고 계세요.”

 

대학생이 되어도 꿈에 욕심 많은 수재였다. 무대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서클을 만들었다. 와중에도 성적 관리는 여전했다. 수석으로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을 한다. 다만 여전히 자신의 미래가 뮤지컬 무대일지 정극 무대일지 카메라 앞일지는 안개 속이었다고.

 

아이돌이요? 제가 무슨. 그건 정말 내외로 타고난 예쁜이들이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건 정말 생각 안했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성우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 거듭됐어요.”

 

화술수업을 담당하는 겸임교수가 EBS 최지환 성우였다. 수업에서 마이크 앞에 성우처럼서게 되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졸업 즈음엔 졸업작품 등 녹음 제의도 들어왔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좋은 실습 기회라 여겨 모두 다 받았고, 반응도 좋았다. 성우 스터디에도 들었다. 그 때 만난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성우를 목표로 삼고 길을 다져갔다.

 

김승준, 신용우 선배님 덕후였어요. 목소리 녹음 파일 듣다가 잠들었죠. 다만 대학시절 성우를 목표로 삼았음을 대외적으로 밝히고 다니진 않았어요. 성우는 연기자가 아니란 주변 시선 때문에요. 한동안 남동생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죠.”

 

 

#- “선생님 성우예요?” 방과후 성우교실 강사 김은연의 행복했던 나날

 

사실 어머님은 그녀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길 원하셨다. 성우지망생, 험한 길을 선택한 그녀 역시 그게 적성에는 맞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지망생에겐 돈이 필요하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더욱이 지금 공부하는 것과 연관된 일을 하며 학비를 대고 생활을 하면 좋겠다.’

 

열여덟번째 연재 고개에서야 털어놓지만 성우 지망생들 공통의 바람이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가계부를 쓰다 몇 번씩 던져버리고 넥타이 매고 출근하자니 야근공화국 대한민국에선 학원 시간을 맞추는게 버겁다. 사실 성우 지망생 최대의 난관은 실력을 쌓는게 아니라 현실과의 절충안을 찾아 장기 플랜을 짜는 것.

그런 점에서 그녀는 행운아다. 초등학교 방과후수업에 성우교실이 도입되는 그 시기에 기회를 바로 잡는다.

 

김지혜 선배님(1992 KBS 23)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수학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선배님이 성우학원과 동시에 방과후 성우교실을 시도하시는거에요. 학원 수업을 착실히 듣는 한편 방과후교사 지도사 양성과정도 병행하면서 제1기 영어더빙지도사자격을 취득하고 방과후 교사로 1년간 서울 소재 학교에서 활동했어요. 결국엔 어머님 소원대로 교사가 된거죠. 평생 직업은 안 된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에요. 역시 성우가 제 천직이니까. 그래도, 그 땐 제게 큰 도움이 되고 즐거웠던 시간임엔 틀림없어요.”

 

 

학생들에게 한번은 거짓말도 했다. 선생님 진짜 성우에요?”라고 물었을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 나 성우야라고 했다고.

 

그 당시엔 자기 최면이었어요. ‘어차피 될거잖아라면서. 사실 대원방송6기 시험 최종까지 가서 그 중 저만 떨어졌거든요. 컸죠. 충격이. 충격에서 벗어나 난 7기 성우라고 최면걸고 시작하던 때예요. 학교 세 곳에 출강하며 그 사이 많은 학생을 만났어요. 그동안 전 정말 늘었어요. 선생님으로서도, 또 성우 지망생으로서도. 아이들에게 성우를 가르쳐주면서 아이들의 말뽄새가 예뻐지고, 그 변화하는 모습에 부모님들이 좋아하죠. 동시에 제가 치어업하게 되니까 분기마다 학생수도 늘어나고 제 실력도 늘어나요. 그리고 정말로 7기 때는 합격했죠.”

 

합격 통보를 받을 때 수업 중이었다. 쉬는 시간에 부재중 전화가 있어 살짝 예감을 했다.

 

장예나 선배님이 받으시더라고요. ‘김은연 씨 합격하셨어요라는데 울었지 뭐예요. 아이들한테는 들키지 않으려 정돈하고 교실에 들어갔어요.”

 

1년에 한번 열리는 어린이 성우대회 때 진짜 성우가 되어 응원하러 갔다. 지금도 그 때 만난 학생들과는 연락하고 지낸다. 꿈이 선생님따라 성우가 된 학생도 있다. 그렇게 성우지망생은 선생님이 되어 자신이 배운 것과 기분좋게 꾸었던 꿈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주고 진짜 성우가 되었다.

 

 

 

#그녀는 검소한 매력쟁이

 

다니엘 웰링턴을 차시는군요. 전 파슬인데.”

, 실용적인 게 좋아요.”

 

그녀의 시계. 백화점에서 볼 수 있는 브랜드 시계 중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중저가다. 그러나 알뜰하면서도 나름의 멋을 낼 줄 아는 이들에겐 좋은 선택지가 된다. 절제되고 심플한 느낌, 검소한 맛이 있다. 성우 김은연 본연의 매력을 뿜뿜하는 아이템이다.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는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며 번역료로 먹고 살았다. 가난함에도 공부에 매진하는데 주안점을 뒀고 일감이 반토막나면 공부할 시간이 두배로 늘었다 좋아하던 고학생, 그치만 외출할 때 보면 여느 부르조아 부럽지 않게 멋쟁이였다. 단벌신사라도 절제되고 말끔하게 허용된 선 안에서 자신의 매력을 발했다.

 

제가 사실 돈을 많이 안 써요. 꿈에 대한 욕심은 커도 물욕은 없어요. 지망생 때 그런 성격이 도움이 됐죠. 학교 세 곳에서 수업하고, 가끔 언더그라운드 일을 하는 정도로 제게는 풍족함이 주어졌어요. 제가 그랬잖아요. 방과후 성우교사가 지망생으로 큰 도움 됐다고. 공부와 유관한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보장된 수입에, 공부할 시간 여유도 주어졌으니 제겐 정말 일생 중 보람찬 1년이었죠.”

 

세상 사람들은 다보탑처럼 화려한 미인에 주목하지만, 석가탑처럼 수수한 미인을 선망하는 이도 있다. 화사함 대신 내면에 빛을 담고 은은하게 그것을 발하는 성우계의 숨은 매력쟁이다. 성우 지망생이라면 역시 체크할 대목이다. 넉넉지 않게 지망일기를 쓰며 지혜롭게 아끼면서도 아무렇게나 다니지 않고 부담 없는 선에서 충분히 멋낼 줄 아는 성품이 꿈을 놓지 않도록 만드는 지구력과 상대를 매료시키는 매력 겸장의 인재를 만든다.

꿈을 이룸에도 또 다른 꿈이 있음에, 지금도 그것을 잃지도 잊지도 않았다. 꿈에 욕심 많은 여인은 오늘도 마이크 앞에서 금욕적이고도 고고한 자태를 발산하고 있다.

 

 

 

 

#절대음감의 성우 탄생, 현재진행중인 대원의 신성

 

고대하던 성우계 입성, 허나 현실이 된 순간 장밋빛 미래는 또 다른 벽으로 갈 길에 장막을 친다. 어려움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고, 지망생 때는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정말 잘 하는 줄 알았다니 웬걸, 입봉하기 전 선배들의 녹음장을 참관하니 클라스가 다르잖아. 근자감에 부끄러웠고 그러다 후딱 지난 3개월, 드디어 데뷔를 한다. 그런데.

 

데뷔 역할이 죽는 역할이에요?”

가면라이더에서 죽는 여자로 데뷔했어요. 대사는 없고 으어억하고 죽는 소리만 내요.

속상하셨겠어요.”

아니요. 정식 데뷔인데 기분 나쁘긴 커녕 기뻤죠. 다른 대사가 없어 실수할 부담도 없었죠.”

 

분명 그녀는 연기 뿐 아니라 노래에도 욕심과 사랑이 많다. 소원대로 출연작 못지 않게 한국어 버전 오프닝, 엔딩, 테마곡을 부르며 대원방송의 공식 디바(?)가 됐다. 실제로 주변에서 너 노래 시키려고 뽑았나 보다할 만큼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엄마찾아 삼만리 주제가를 부를 땐 올드하지 않게 불러달라는 주문을 받고 난감했죠. 노래가 올드한데 이를 어쩌지 하고 고민도 했죠. 이 밖에도 빨간머리 앤의 오프닝, 엔딩과 꼬마너구리 라스칼 오프닝, 엔딩, 던전앤파이터 숙명의 문 오프닝 등을 담당했습니다.”

 

나무위키에선 그녀를 절대음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성우의 영역이 연기 뿐 아니라 노래라던가 미래의 성우를 양성하는 지도자로까지 생각 이상으로 넓어질 수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인터뷰다. 멀티플레이어로 출항한 스물아홉살 전속 성우 그녀가 10년 후 서른아홉살 땐 대원 극회에 어떤 족적을 남기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리고, 기대되는 대목이 또 하나 있다.

 

 

#추억의 명작 애니메이션 재더빙, 그리고 추억을 복원하는 데 그녀가 있다

 

현재 케이블 애니메이션 채널은 복고풍 바람이다. 투니버스는 카드캡터 체리를 20여년만에 재더빙해 방영하고 대원방송은 몇 발 더 나가 70~80년대를 수놓았던 명작 고전을 다시 더빙해 방영하는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신작으로 마징가Z를 방영한다고 했을 때 필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극장판 인피니티Z 국내 개봉과 맞물려 벌어진 경사(?)가 되겠다. 사실 명성과 달리 75년 방영 후 정작 공중파에선 다시 재방하지 않아 이후 태생에겐 전설처럼만 여겨지던 마징가Z. (비디오로는 90년대 초 발매된 적이 있다) 게다가 80~90년대 일요일 아침 어린이들을 깨우던 만화 동산시절을 재연하며 톰소여의 모험, 플란다스의 개, 꼬마 너구리 라스칼, 빨간머리 앤 등 고전 명작의 주말 아침 편성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 작품의 오프닝, 엔딩을 그녀가 맡았고 당연히 극 중에서도 출연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점, 90년 출생한 그녀가 과연 출생 전후로 방영했던 이들 작품을 알고 있을까.

 

몰랐어요. 그냥 그런 작품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릴 적 이들을 보며 자라난 추억은 없죠. 오히려 부모님이 알고 계실 거예요.”

부담 되거나 하진 않았나요? 추억의 작품을 다시 살려내야 하는데.”

저는 그래서 오히려 과거 더빙됐던 작품은 보지 않고 나는 나라는 각오로 녹음에 임하려 해요. 뭐랄까, 봤던 캐릭터를 다시 연기하는 게 더 어려워요. 그리고 과거 선배님들의 캐릭터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면서도 정말 어려운 상황이예요. 밀짚모자 루피를 강수진 선배님이 안 하고 다른 사람이 한다는 걸 생각하기는 정말 어렵잖아요.”

 

즉 그녀에겐 완전한 신작이나 다름없단 이야기다. 하지만 세월을 넘어 고전이 가진 감동은 통했다. 엄마찾아 삼만리의 경우 노래 외에도 에밀리오와 수녀님 등 마르코가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 중 상당수를 맡게 됐다. 추억은 없어도 너무 좋았다고 한다. 특히 작품에 처음 투입되던 때 기억은 강렬하다.

 

주인공 마르코를 양정화 선배님이 맡으셨죠. 초반에 이별의 눈물을 흘리던 장면에서 정말 열연하며 우시는데 그만 보고 있던 저까지 터졌어요. 사실 저도 오프닝 곡을 부를 땐 마르코의심정을 담아서 불렀던 터라 큰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마징가Z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아수라 남작()이다. 닥터 헬보다 더 유명한 전설의 악역, 물론 이 역시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영화 박물관이나 노래를 통해 접한게 다예요. 그치만 로봇의 상징 아닌가요. 잘 준비해야 겠다는 사명감이랄까? 아수라 남작은 캐스팅 전에 어느 정도 제가 맡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했어요. 기수 중에서는 제가 비교적 낮은 음역대의 톤이라 맡게 된가 아닐까 해요. 노역도 어느 정도 빈번하게 맡고요. 그런데 막상 작품 속의 아수라 남작을 보니까 또 당황스러운거예요. 첫 인상은 그랬어요. 어쨌든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또 하나의 아수라 남작()인 이창민 성우와 녹음 전날 같이 호흡을 맞춰보기도 하면서 준비했어요. 꼭 녹음장에서 같은 마이크를 쓰기에 더욱 호흡이 중요하죠.”

 

아수라 남작은 어떤 캐릭터로 다가왔나요?”

 

많이 알아봤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어 되려 여쭙고 싶어요. 일단은 어려운 캐릭터죠. 헬박사에겐 자신을 낮추지만 쇠돌이한텐 강단이 있어야 하고, 또 포지선은 악역인데 이런 다양한 것들을 적절히 표현해 내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당당하고 멋있는 여자이기도 하구나 깨달았어요. 군중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는 장면인데 70년대라면 분명 여성인권이 그다지 신장되지 않았을 시기일 터, 저렇게 한다는 것이 감명있게 다가왔죠. 게다가 간부로서 당당하게 명령하는 포지션이기도 하고 말이죠.”

 

“2004년에 이미 마징카이저가 애니원으로 방영된 적 있어요. 거기선 스승이셨던 김지혜 성우님이 유미 역을 하기도 했고요. 혹시 더빙 전에 찾아보셨나요?”

 

차명화 선배님이 아수라 역을 하셨다고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일부러 안 찾아봤어요. 전 지금 제가 맡고 있는 오리지널 TV판의 아수라 남작이 시초란 생각으로 작품에 임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아수라 뿐 아니라 다른 작품 캐릭터를 맡을 때도 동일해요. 플란다스의 개에서 누레뜨 할머니를 맡을 때도 그렇고요. 내 자신의 캐릭터를 흔들리지 않고자 하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구축된 후에는 찾아봤어요. 확실히 달라요. 새파란 저의 할머니랑 선배님들의 연기는 깊이가 달라요.”

 

그녀보다는 부모님이 더 친숙할 아수라 남작, 5월에 개봉한 극장판 인피니티에서도 아수라 남작은 출연한다. 부모님은 딸이 아수라를 맡은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녀는 내가 알리기도 전에 먼저 두 분이 다 알아버렸다고 한다.

 

남동생이 로봇 광팬이자 성우 덕후예요. 극장에서 작품을 보고선 어 우리 누나가 아수라다하며 엄마 아빠한테 알려준 거예요. ‘45주년 기념작에서 아수라 맡았니?’하고 전화 주시더라고요. 제가 덤덤하게 말하는거 같겠지만 역사적인 작품에다 마징가 월드의 상징적인 캐릭터가 총집결하고 새로운 캐릭터까지 등장하는 화려한 작품이라 많은 생각에 차 있죠. 선배님들은 그런 저에게 어차피 1화에서부터 캐릭터가 완벽히 구축되는 일은 없다고 하세요. 더 나아져 가는 과정이라고 하시죠.”

 

극장판은 5월에 개봉됐고, TV판은 여전히 방영 중이다. 90화를 넘는 대장정이기에 지금도 그녀의 아수라는 점점 더 진화하고 있다. 지금의 아수라는 2018년을 살아가는 그녀의 시점에서 다시 탄생한 새로운 캐릭터다.

 

 

 

#성공한 덕후, ‘성우 김승준에게 아직 못한 말 최초 공개!

 

성우가 되어 맘껏 활약하는 것만으로 그녀의 지금 삶을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성공한 덕후란 점을 빼 놓아서는 안된다.

 

사실 제가 어릴 때 성장하며 보았던 작품들은 지금 작품들보다 한 세대 뒤의 것들이죠. 리리카SOS라던가 신의괴도 잔느, 그남자 그여자,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같은 작품들이요. 나의히어로 아카데미아나 오소마츠 6쌍둥이 등은 지망생으로서 꼭 봐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죠. 특히 개인적으로는 웨딩피치, 그남자 그여자의 여주인공(미야자와)을 좋아해서, 리메이크작에서 그 역할을 제가 맡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죠?”

 

저랑 비슷해요. 겉과 속이 달랐던 그녀, 저도 한다름하니까요. 전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내면에선 나름 풀어져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죠. 1화에서 그녀가 남주인공 지성준한테 킥을 먹이던 마지막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지성준 같은 남자 캐릭터를 만나 보고 싶기도 해요. 그렇게 허영덩어리였던 애가 이후 친구를 사귀고 남을 보듬어주는 모습으로 성장하는 건 제가 이상적으로 그렸던 학창시절 그 자체예요.”

 

지성준이라면, 김승준 성우님이 맡았었죠.”

 

저 그래서 김승준 선배님 좋아해요. 사실 지성준 뿐 아니라 웨딩피치의 케빈, 마법소녀 리나의 제르가디스 등 맡으신 캐릭터들 다 좋아해요. 그러다 드디어 원피스 녹음실에서 만났는데 속으로 꺄아하고 비명을 질렀죠. 심쿵 심쿵한거예요. 아직 선배님한테 못한 말이 있어요. ‘선배님 때문에 난 성우가 됐어요라고.”

 

#10년 후 서른아홉 김은연에게 부친다

 

성우이자 성공한 덕후, 서른도 되기 전 너무 부러운 삶을 쟁취했다. 그럼 그녀의 인생은 이미 다 이룬 삶인가.

 

스물일곱살에 인생의 목표를 이루니까, 정말로 1년 동안은 목표가 사라져서 힘들었어요. 전 목표지향적 인간이니까요. 요즘은 다시 새로운 목표를 가졌어요. 성우로서 모자람을 많이 느껴서 치즈처럼 어디에나 어울리고 익을수록 맛이 더해지는데다 파트너 따라 맛이 달라지는 성우가 되자!’하고 생각해요.”

 

성우 김은연은 성우를 소통이라고 정의한다. 면접때도 그렇게 말했다. 연기는 늘 인물과의 소통이라고.

 

“20대의 김은연이 무대에서 맡았던 인물들은 늘 날카롭고 재수없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만 왔어요. 내 인생이 그간 날카롭고 똑 부러졌죠. 보이는대로 역할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성우가 되니까 외계인에서 어린이까지 맡을 수 있는 폭이 거의 우주급으로 넓어져요. 그리고 소통은 어느덧 작품 너머와도 이루어져요. 너무 부끄럽고 감사하지만 최근 원피스의 스무디로 인해 팬이 생겼어요. ‘내 덕에 힘을 얻는다고 해요. 그리고 전 인간으로서 주위의 고통받는 이를 그냥 못 보는 성격이라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봉사하고 이바지하는 역할을 맡는게 인생 목표이기도 하죠. 성우로서 그 역할까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종장 다시 스물아홉 김은연으로 돌아와

 

저는 노력하고 있는 신인입니다. 팬들의 응원과 사랑이 많은 힘이 됩니다. 그걸 힘이 되는 성우가 되어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꿈이 많은 사람입니다. 성우 외에도 음악가로서 뉴에이지 같은 힐링 가능한 음악으로 소곡집을 내보고 싶고 노래 뿐 아니라 건반, 작곡 등 다양하게 해보고 싶습니다. 한 세상에 태어나 남에게 도움되고 싶고 그러면서 또 내가 하고픈 건 다 해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전 그 중에서 유독 성우가 좋습니다. 이걸 안했다면 난 어찌 살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홉은 완전한 열에 한없이 가깝고도 불완전한 숫자라고 한다. 그 불완전함이 불안감이 아니라 무한한 기대일 수도 있음을 스물아홉살 김은연이 알려 준다.

 

 

 

글 사진 권근택 langriss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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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빛의목소리